국가 사적・오코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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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 성터

오코 성터는 난코쿠시 오코초 야하타의 통칭인 오코야마에 있습니다. 고치현을 대표하는 성터의 하나이며 2008년7월28일부로 그 일부가 국가지정 사적[오코 성터]로 지정되었습니다. 시코쿠를 대표하는 전국시대의 무장 초소카베가 본거지로 삼은 오코성이 있던 터입니다.


오코 성터 항공 촬영

오코 성터 모형

가초평야에는 여러개의 구릉이 점재하고 있는데 오코야마도 그 중의 하나이며 산은 사문암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표고는 97m, 산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급경사이고 북쪽은 완경사지이며 서부쪽에는 표고 49m의 작은 구릉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쪽경사면 아래에는 고쿠부강이 흐르고 있고 서쪽에서 남쪽 일대가 논습지입니다. 축성 당시에도 습지대가 존재한 것으로 추측되어 자연의 요새로 되고 있습니다. 북쪽은 낮은 능선을 따라 시코쿠산지로 이어져 있었으나 현도(구국도) 로 인해 분단되었고 또 예전에 실시한 공원화사업으로 산정부까지 도로가 건설됨으로써 성터는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오코성터의 발굴조사는 고치현립 역사민속자료관 건설과 관련된 주변환경정비의 일환으로서 현사적정비에 앞서 실시한 확인조사로 1985년부터 1989년에 제1~5차 발굴조사(국고보조), 1990년에 제6차 발굴조사를 고치현 교육위원회가 실시했습니다.

조사는 사적의 끝부분, 니노단 구역, 산노단 구역, 욘노단 구역으로 실시되었습니다. 끝부분에서는 돌층계 유구와 초석 건물터, 지진 유구, 3단에서는 토루・돌로 쌓은 성벽, 초석 건물터, 계단상의 유구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다량의 토사질 토기와 수입도자기, 연호가 새겨진 기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유구들은 발굴조사의 성과에 토대해 성터의 현상을 변경하지 않고 벌채와 식재를 하면서 유구에는 성토를 하여 출토상태를 복원했습니다.
오코성의 축성년대는 불명이지만 15세기 후반에서 에이세이5~6년(1508~09)에 낙성된 시기(초소카베 모토히데 시절)를 포함해 오다카사 성터에 이전한 덴세이16년(1588)경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코 성터 산책
목조 초소카베 모토치카 좌상

현지정
목조 초소카베 모토치카 좌상
고치시 하타 신사 소장

초소카베우지의 가문

초소카베우지의 가문
동그라미에 가타바미

초소카베 우지/제21대 당주
초소카베 모토치카
모토치카는 덴분8년(1539), 초소카베 구니치카의 장남으로 오코에서 태어났습니다.
구니치카는 다른 전국군웅들이 할거하는 가운데 군사/외교 수완을 발휘해 착실히 그 지배권을 넓혔지만 에이로쿠3년(1560),도사중앙부의 패권을 건 모토야마우지와의 격전중에 갑자기 병사. 즉시 모토치카가 가독을 상속하고 초소카베가 제21대 당주가 되었습니다.
그후 모토치카는 부친의 뜻을 이은 전투를 통해 모토야마우지에서 아사쿠라성을 빼앗고 도사중앙부를 장악합니다. 또한 모토야마우지/아키우지/츠노우지 등 다른 유력국인을 연이어 항복/멸망시켜 덴세이3년(1575년), 숙원이던 도사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출토품

쌓은 초석 건물터, 돌층계 유구(복원)

쌓은 초석 건물터, 돌층계 유구(복원)

성터에서는 기와 파편이나 토사질 토기편들과 함께 청자/백자/소메쓰케로 불리는 수입도자기편, 세토/비젠/도코나메 등의 국산토기편, 청동/철제품, 동전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연호가 새겨진 기와나 화승총의 탄환이나 신앙관계의 유물, 철제품, 동전도 출토되었습니다.


출토품
덴세이 3년명 기와

덴세이 3년명 기와

초소카베 모토치카가 도사국을 통일한 덴세이3년(1575)에 대규모의 개수를 했다는 것을 이 기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기와에는 [오카우의 어…] [기와공 센슈…] […덴세이3년][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개모양 토제품

개모양 토제품

탄알

탄알

문의처

고치현립 역사민속자료관
〒783-0044 고치현 난코쿠시 오코초 야하타 1099-1
TEL.088-862-2211 FAX.088-862-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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